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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적 사고와 계산과학

2014년 2월 서진근

 

과학은 논리적 이론과 관찰·실험을 통한 현실 검증이라는 두 축 위에서 발전해왔다.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은 인류를 미신과 무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현대 과학의 제1축이 이론, 제2축이 관찰과 실험이라면, 최근에는 컴퓨터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수학 기반의 계산과학(Computational Science)이 제3의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계산과학은 자연 현상을 수학적 논리 체계 안에서 기술하고, 수리 모델링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시화함으로써 자연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 응용 범위는 의료영상, 기상 및 지구과학, 생명과학, 빅데이터 분석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현실 검증이 결여된 이론은 “공익에 소홀한 자기사랑(malignant self-love)”으로 흐르기 쉽다. 수리 모델링은 연구 대상의 모든 속성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내재된 특징과 계측 가능한 물리량의 규모(order of magnitude)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존재성·유일성·안정성을 만족하는 계산 가능한 수식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초기 목표가 지나치게 복잡한 경우에는 단순화된 toy model을 통해 국소적인 현상을 세밀히 분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 검증 과정은 연구의 왜곡을 방지하고, 모델과 실제 사이의 불일치를 보완하면서 깊이 있는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게 한다. 최근 컴퓨터 성능의 발전은 수치 시뮬레이션을 통해 장기간·고비용의 물리 실험을 대체할 수 있게 하여,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현실 검증을 간접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은 물리적 사실보다는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현실의 물리 조건을 무시한 비현실적 프레임 속에서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세계에서는 인간이 새처럼 날거나 100m를 1초에 달릴 수도 있다. 반면 계산과학의 시뮬레이션은 과학적 진실을 기반으로 해야 하며, 수리모델의 한계 또한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때로는 비과학적 애니메이션을 과학적 시뮬레이션인 양 포장하는 경우도 있어, 이에 대한 비판적 관찰이 필요하다.

 

탐구 과정에는 언제나 혁신(innovation)과 개선(improvement)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폐쇄적이고 진부한 개선은 자기만족에 머물러 혁신을 저해하고, 반대로 조급하고 불완전한 혁신은 협력 연구의 유기성을 해칠 수 있다. 이론 중심의 수학은 논리의 완벽성에 집착한 나머지, 극히 제한된 조건에서만 결론을 도출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과거의 권위가 설정한 좁은 틀 속에서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기도 한다. 첨단 과학의 혁신은 방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요구하므로, 그 가치를 집단이 공유하기 어렵다. 따라서 “공익에 소홀한 자기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소통과 협력이 필수적이다

의료영상분야에서 딥러닝

2017년 1월 2일 서진근

 

최근 몇 년 사이 딥러닝(Deep Learning) 기술은 의료영상 분야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고성능 GPU를 이용한 병렬 컴퓨팅의 발전, 대규모 의료데이터의 축적과 분석 기술의 성숙, 그리고 구글·IBM·애플 등 글로벌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와 전략적 참여가 있다. 이들 기업은 방대한 영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료영상 판독의 정확도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구글은 딥러닝을 활용해 당뇨성 망막병증(diabetic retinopathy) 진단 모델을 개발하여 안과 영상 판독의 자동화를 추진하였고, IBM은 인공지능 Watson을 암 진단과 치료계획 수립에 적용하는 임상적 실험을 진행하였다. 애플은 개인용 헬스케어 기기와 병원 의료시스템을 연계하여 사용자 중심의 지능형 의료 서비스를 구축하려 하고 있으며, 삼성메디슨은 딥러닝 기반의 초음파 영상 자동 분석 기술을 연구 중이다. 이처럼 인공지능은 의료영상의 판독 보조, 진단 정확도 향상, 영상 기반 질병 예측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의료현장의 반응은 기대와 신중함이 공존한다. 많은 의사들은 딥러닝이 의료영상 분야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여전히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인간이 퓨마를 100m 달리기에서 이길 수 없듯이, 인공지능 역시 의료현장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 제약을 안고 있다.기계학습에 필요한 훈련 데이터(training data) 는 다수의 의사 판독 결과를 기반으로 수집된다. 따라서 딥러닝 모델의 학습 능력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한 패턴’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 때문에 소수의 숙련된 전문의만이 발견할 수 있는 희귀 질환이나 미세한 병변은 데이터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모델이 해당 질환을 인식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물론, 이러한 소수 전문가의 판독 정보를 지능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데이터 관리나 알고리즘적 보완이 시도될 수는 있지만, 일관된 품질을 유지하기는 근본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인공지능은 의료진의 시간과 노력을 절감하는 효율적인 도구가 될 수는 있으나, 숙련된 전문의를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특히 암 진단처럼 다양한 임상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이 최종 판단자가 되기 어렵다. 인공지능은 임상적 의사결정의 보조 역할을 수행할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 권한은 여전히 전문의의 몫으로 남는다.

 

결국 의료영상 분야에서의 딥러닝 발전은 수학적·통계학적 모델링, 임상적 타당성, 그리고 산업적 실행력이 조화를 이룰 때 현실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학문적 연구는 이론의 정교함에 머물지 않고, 실제 의료산업의 발전과 환자 진료의 질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 실증적이고 검증 가능한 연구를 통해 임상적 신뢰성을 확보할 때, 딥러닝은 의료영상의 새로운 도구로서 실질적인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수학적 모델을 이용한 생체조직 물성 영상화 연구

2012년 2월 서진근

 

생체조직의 물리적 특성화 기법은 인체 내부의 전기적·기계적 특성을 정량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연구 접근이다. 이 연구의 목표는 생체조직의 전자기적·기계적 물리량을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학적 모델과 영상화 알고리즘,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적 기반을 마련하여 의생명학적 응용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있다.생체 내부의 전자기적 또는 기계적 특성을 영상으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의료영상기법보다 더 복잡한 이론적 해석과 정밀한 계산 절차가 필요하다. 인체 내부의 물성을 영상화하려면, 먼저 전류·자기장·기계적 진동 등의 물리량을 인가하고, 전극·코일·MRI·초음파·광학 장비 등 적절한 계측 방법을 통해 그 반응을 측정해야 한다. 이렇게 얻은 데이터는 인가된 물리량과 생체조직의 물성 파라미터가 반영된 편미분방정식—맥스웰 방정식(Maxwell’s equations)이나 탄성방정식(Elasticity equation) 등을 기반으로 수리적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데이터를 이용해 인체 내부의 물리적 특성을 영상으로 복원하는 과정은 수학적으로 역문제(inverse problem) 로 표현된다. EIT(Electrical Impedance Tomography)나 MRE(Magnetic Resonance Elastography)와 같은 기법은 CT나 MRI와 달리 비선형적(non-linear)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계산적 측면에서 훨씬 다루기 어렵다. 새로운 영상 기법이 의료 진단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이론적 타당성뿐 아니라 재현성(repeatability), 견고성(robustness), 공간 해상도(spatial resolution), 비침습성, 실시간 처리 가능성, 그리고 기존 영상법과의 차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생체조직의 전기적·기계적 물성은 각각 도전율(conductivity) 과 탄성률(elastic modulus) 로 표현되며, 이러한 값은 질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변한다. 예를 들어 종양이나 염증이 발생하면 주변 조직의 도전율이나 탄성률이 변하기 때문에, 이를 영상화하면 기존의 단층촬영법(CT, MRI, PET)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조기 병변을 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성은 인체 내부에서 직접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수리모델을 기반으로 한 역문제의 해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생체조직 물성 영상화 연구는 의료영상 분야에서도 이론적 복잡성이 높은 영역에 속한다. 이 연구에는 수학·공학·의학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며, 편미분방정식, 수치해석, 과학계산뿐 아니라 생체전자기학, MR 물리, 영상처리 등 폭넓은 지식이 요구된다. 또한 의료진과의 소통을 통해 이론적 모델이 실제 임상 환경에 맞게 조정되는 과정이 중요하다.이러한 융합적 연구를 통해 개발되는 영상화 기술은 인체 내부의 물리적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초기 단계의 종양 조직 영상화, 신경 활동의 시각화, 전자기 치료 기술의 최적화, 생체 신호원의 전자기 분포 분석 등 다양한 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수학은 이 과정에서 의료영상의 해석 언어로서, 그리고 생체 현상의 물리적 의미를 구체화하는 실질적 도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순수수학자의 의공학 도전과 성찰

2016년 4월 서진근

이 글은 순수수학자로 출발한 필자가 의공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된 과정과, 그 여정 속에서 수학이론이 동물실험의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기쁨과 마지막 관문인 임상 적용 단계에서 마주한 한계를 경험한 뒤, 목표를 잃고 현학적 연구에 매몰되었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느낀 반성을 기록한 것이다.

 

2001년 12월 31일 밤 11시 무렵, 미네소타에서 안식년을 보내던 필자는 우응제 교수와 권오인 교수에게 “노벨상 받는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냈다. 당시 필자는 MRI 장치 내에서 생체를 회전시키지 않고 인체 내부의 도전율(conductivity) 과 전류밀도(current density) 영상을 동시에 얻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새로운 수리모델이 떠올랐다. 그 핵심은 “주입 전류에 의해 유기된 자기장의 z-성분의 라플라시안이 도전율 분포의 변화를 전류밀도의 수직 방향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개념이었다.

 

그 순간 이후 우리는 망설임 없이 연구에 착수했다. 난관이 생기면 전공의 경계를 넘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나섰고, 수치 시뮬레이션에서 출발해 동물실험으로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을 거쳤다. 그러나 임상 적용이라는 마지막 관문 앞에서 끝내 넘기 어려운 벽을 마주하고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절감한 가장 큰 문제는,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이론가로서 상대적으로 쉬운 ‘현학적인 연구’로 도피하려는 유혹이었다. 실제 현장에서 불확실성이 크고 다루기 까다로운 연구일수록 그 가치는 높지만, 학계와 학술지는 여전히 논리적으로 세련된 이론 연구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필자 역시 이론의 안락함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돌이켜보면, 필자는 교수로 재직한 이후에도 ‘시나리오 창조력’이 부족해 주로 문제 해결형 수학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Eugene Fabes에게서 “어려운 수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식 속의 관계를 스스로 그려보면 복잡한 문제도 단순해진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지나친 몰입은 불면과 피로를 불러왔고, 전체를 보는 시야를 잃게 하여 지엽적인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만들었다. 늘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능력의 한계 탓에 종종 편협한 이론적 사고로 흘러가곤 했다. 그래서 필자는 이론과 현실 검증의 순환(iteration) 구조를 연구 시스템 속에 구축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다.

 

1998년 IMF 시기부터 필자는 역문제(inverse problem)의 순수 이론 연구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응용 연구로 관심을 옮겼다. 2000년 초 연구모임에서 우응제 교수가 자기공명 임피던스 단층촬영법(Magnetic Resonance Electrical Impedance Tomography, MREIT) 을 제안하였고, 우리는 즉시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MREIT는 주입 전류에 의해 유도된 인체 내부의 자속밀도 분포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측정하고, 그 데이터를 이용해 인체 내부의 도전율 영상을 복원하는 기술이다. 이 과정은 도전율과 자속밀도 사이의 복잡한 비선형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에, 다른 의료영상기법보다 훨씬 정교한 수학적 모델링과 영상복원 알고리즘이 요구된다.필자는 우응제, 권오인 교수와 함께 수학적 모델링과 알고리즘 개발에서부터 MRI 계측 기술, 임상 실험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융합하며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팀은 Biot–Savart 법칙을 분석하여, 측정된 자기장 B_z의 2차 미분(라플라시안)이 도전율 분포의 등전위면 방향 변화율을 감지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또한 두 개의 독립적인 전류 주입으로 얻은 전류밀도 벡터장이 만드는 평행사변형의 면적이 모든 영역에서 0이 아니라면, B_z데이터만으로도 도전율의 공간적 변화를 완전히 복원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나아가 기하학적 인덱스 이론(Geometric Index Theory) 을 이용해, 측정 대상 물체의 표면에 전극을 적절히 배치하면 위 조건이 항상 만족됨을 보였다.

 

이 수학적 결과를 토대로 우리는 도전율 표현 공식을 유도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무회전 MREIT의 핵심 알고리즘인 harmonic B_z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이 공식은 도전율과 측정 데이터 간의 비선형 관계를 암묵적(implicit) 형태로 표현하지만, 고정점 이론(fixed point theory)에 따라 수축 사상(contraction mapping) 성질을 만족하도록 구성되어 반복법(iteration method)을 적용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기존의 EIT(Electrical Impedance Tomography)에서 단점으로 지적되던 전류밀도의 변화에 대한 도전율의 둔감성(ill-posedness) 을 오히려 안정화 요소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무회전 MREIT의 개념을 세계 최초로 제안한 이후, 우리는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관련 수학이론과 실험기술은 빠르게 발전했고, 개발된 MREIT 방식은 당시 존재하던 도전율 영상 기술 중 가장 높은 공간해상도를 달성했다. 이어서 세계 최초로 동물 및 인체 MREIT 실험에도 성공했다.현재 MREIT 기술은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성과로 평가받고 있으나, 임상 적용을 위해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특히 측정시간 단축과 주입전류 감소가 핵심 과제이다. 필자는 이 마지막 관문 앞에서 때때로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는 지금 진정한 의미의 연구를 하고 있는가?” 단지 “열심히 연구한다”는 자기만족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채 논리적 완벽성에만 매달리면, 결국 한정된 틀 안에서 지엽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그칠 뿐이다.

 

외국을 다니며 강연을 하다 보면, 영어를 좀 더 잘했다면 연구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영어권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기기도 한다. 영어권의 명문대 교수들 중 일부는 유창한 언어 구사력으로 최신 연구 동향을 빠르게 따라가지만, 새로운 틀을 창조하기보다는 기존 연구의 개선에 머무르기도 한다.

최근 들어 필자도 나이가 들면서 체력과 집중을 요하는 창의적 연구는 되도록 피하게 되었고, 대신 연구 자문을 맡거나 기존 이론을 보완·개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젊은 교수 시절부터 이어온 연구들은 이미 몸에 익어 비교적 적은 에너지로도 수행할 수 있어, 고령이 되어도 큰 부담 없이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분야를 익히는 일은 상당한 에너지를 요구하며, 노년에는 그 과정에서 감기 같은 사소한 질병도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릴까 걱정하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는 고령 연구자가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한계이자, 결국 받아들여야 할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사회에서의 수학: 르네상스 예술 복원에서 의료영상까지

연세대학교 서진근 교수2009년 5월 1일

 

수학은 철학과 함께 인간의 사고 능력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인류 문명의 진보에 기여해 왔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학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용성과 무관하게 개인이나 집단의 사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문화(invisible culture)’로 형성되기도 했다. 거리와 공간의 개념은 수학적 분석 도구를 통해 정교하게 진화하여, 복잡한 현상 속의 규칙과 패턴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하고 전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수단이 되었다.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대표적인 수학 방정식으로는 전자기파를 설명하는 맥스웰 방정식, 유체의 운동과 난류를 다루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 물체의 변형을 기술하는 탄성 방정식, 그리고 열전도와 확산을 설명하는 열전도 방정식이 있다. 이러한 미분방정식은 에너지나 물리량의 보존 법칙을 기반으로 하며, 시간과 공간에서의 변화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수학적 분석도구는 지문 인식, 음성 인식, 데이터 압축, 의료영상 단층촬영, 암호기술, 애니메이션, 금융 파생상품의 가치평가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수학적 모델링은 복잡한 현상을 사진처럼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속의 본질적 요인을 추출하고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하여 존재성·유일성·안정성을 갖춘 수식을 세우는 과정이다. 뉴턴이 “힘 = 질량 × 가속도”라는 간결한 식을 도출할 수 있었던 것도 필수적인 변수만을 정밀히 선별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지문 인식의 예를 생각해보자. 지문 인식은 개인의 진피층 구조가 평생 변하지 않으며, 두 사람이 동일한 패턴을 가질 확률이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인식을 위해서는 두 지문 간의 유사성을 수량화할 거리의 개념이 필요하다. 지문은 환경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거리 개념은 이러한 변화를 초월한 불변의 특징을 기준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즉 같은 사람의 지문 간 거리는 0, 다른 사람의 지문 간 거리는 0이 아니도록 정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규모 데이터베이스에서 특징과 패턴을 추출하고 이를 좌표축으로 설정하여, 각 지문을 특징공간 내의 한 점으로 표현한다. 이는 마치 주소가 국가, 시, 구, 동, 번지의 좌표체계로 구성되는 것과 같다.수학은 예술 복원에서도 놀라운 역할을 한다. 파손된 르네상스 회화를 벡터 X, 보존된 영역을 벡터 B라 하면, 복원 과정은 근사적으로 AX = B를 만족하는 행렬 A를 구성하는 문제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행렬 A는 열전달 방정식에 기반한다. 영상의 밝기를 온도로 간주하고, 보존된 영역의 정보를 파손된 영역으로 확산시켜 결손된 부분을 메우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디지털 복원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응용된다. 영화 슈렉 제작 당시, 우유를 따르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고 한다. 유체의 흐름을 지배하는 미분방정식, 표면 경계 조건, 부피 보존의 원리를 정밀히 고려함으로써 현실감 있는 장면을 구현할 수 있었다.

 

최근 수학은 의료영상 분야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령화로 인한 의료 수요 증가와 함께 의료경제의 급속한 성장은 영상기술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X-ray, CT, MRI, 초음파, PET 등 다양한 영상 기술은 인체 내부를 시각화하여 진단과 치료에 혁신을 가져왔다. 최근에는 기존 기술로는 얻을 수 없던 전기적, 광학적, 기계적 물성의 영상화가 생리학적 연구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며, 수학자와 공학자, 의사들이 협력하는 융합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생체조직의 물리적 특성을 영상화하기 위해서는 인체에 특정 물리량을 인가하고, 내부 물성에 의해 변조된 신호를 측정한 뒤, 이를 바탕으로 내부의 물성 분포를 복원해야 한다. 여기에는 물리적 현상을 기술하는 순문제(forward problem)와, 측정된 데이터를 통해 내부 구조를 추정하는 역문제(inverse problem)가 모두 포함된다.이 분야는 기존의 영상 기술보다 훨씬 복잡하고, 수학·의학·공학이 긴밀히 결합된 다학제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영상 알고리즘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편미분방정식, 조화해석, 함수해석, 수치해석, 과학계산에 대한 깊은 이해뿐 아니라 생체전자기학, MR 물리학, 신호처리 및 영상복원 기술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다. 실제로 초기 연구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지 못해 비현실적인 가정을 세우거나 핵심 요소를 소홀히 다루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기초이론은 해석, 수치시뮬레이션, 실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검증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결국 수학은 더 이상 추상적인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술의 복원에서 생체조직의 시각화에 이르기까지, 수학은 현대문명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보이지 않는 엔진으로 작동하고 있다. 수학적 사고와 계산기술이 결합될 때, 인류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고 복원하며,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지적 도구를 얻게 된다

현실과 이론의 간극을 메우는 수학: 역문제 연구의 실용적 방향

2007년 1월 3일 서진근

 

전기임피던스 단층촬영(Electrical Impedance Tomography, EIT)은 생체조직의 전기적 특성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기술로, 인체의 전기 생리학적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의학·공학·수학이 융합된 대표적인 연구 분야이다. 이 기술은 기존의 영상기법으로는 얻을 수 없던 새로운 형태의 정보를 제공하며, 단순히 인체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리적 기능과 대사 활동을 영상화함으로써 인체 내부의 동적 변화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잠재력을 지닌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수학적 이론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EIT는 실제 임상이나 실험 환경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난 35년 동안 Calderón, Kohn, Vogelius, Friedman, Uhlmann, Kenig 등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이 분야의 역문제를 심도 있게 탐구하며, 편미분방정식과 해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결과 Annals of Mathematics와 같은 최고 수준의 학술지에 관련 논문이 게재되었고, 미시해석(Microlocal Analysis, Hörmander 이론 및 기하광학적 접근), 유일연속성(Unique Continuation, Runge Approximation, Layer Stripping), 그리고 조화해석(Potential Theory) 등 정교한 이론적 틀 속에서 EIT의 영상 복원(image reconstruction) 이론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이 전제하는 환경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실제 상황에서는 대상의 기하학적 구조를 완벽히 파악하기 어렵고, 경계에서의 전류–전압 관계(Dirichlet-to-Neumann map)가 완전하게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실의 EIT 데이터는 경계 형태나 노이즈에 매우 민감하며, 반면 내부 물성의 미세한 변화에는 둔감하다. 다시 말해, 수학적으로는 존재성과 유일성을 보장할 수 있더라도 실제 측정 과정에서는 아주 작은 오차가 복원 결과를 크게 왜곡시킬 수 있다. 이처럼 EIT 역문제의 본질적인 난제는 데이터의 불균형적 민감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한 문제는 오랫동안 학계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많은 연구자들이 해의 매끄러움 조건을 완화하거나 정칙성 문제를 개선하는 등 이론의 세부적 정교함에 집중했지만, 그 과정에서 실질적 적용 가능성과의 균형을 잃었다. 이러한 현상은 자유경계문제(free boundary problem), 균질화(homogenization), 정칙성(regularity) 이론 등 다른 수학 분야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연구 자체의 완결성과 논리적 완벽성에 몰두한 나머지, 현실 세계의 불완전한 데이터와 실험적 제약을 외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역문제 연구는 이론적 완벽성의 경쟁을 넘어, 실험과 시뮬레이션이 함께 작동하는 실용적 수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수학적 모델이 실제 상황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하느냐가 연구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수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이 아니라,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정밀하고 유연한 도구여야 한다. 이론은 현실로부터 검증받을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고, 현실은 수학적 통찰을 통해 더 명확한 질서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수학은 진정으로 실용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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